[남북동행 아카데미] 제 6장 한국의 햇볕정책과 강경정책

-2000년대의 나날들과 김정일 사망까지의 한반도

 

1절 남과 북, 화해와 갈등의 순간들

 

– 90년대 후반기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

  • 90년 후반기 김일성의 사후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북한은 대남 관계에서 처음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포기했다. 말하자면 우리식 사회주의 제도를 수호하는 수호전이 시작된 것이다.

 

  • 그러던 북한은 1998년 한국에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남한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으로서는 내부 난관을 타개하려면 외부의 지원과 대외 경제교류가 필수적인데, 이것을 해결해줄 대상은 남한밖에 없었다.

 

  • 처음에 북한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흡수통일 전략이라고 비난했으나 점차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1998년 11월 남측에 금강산 관광을 허용했다.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있었으나 김대중 정권의 자제로 남북 화해의 흐름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 2000년 3월 김대중은 독일의 베를린에서 대북 경제지원과 남북 간 화해와 협력 등을 골자로 하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고 물밑 대화를 거쳐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6.15 공동 선언을 발표한다.

 

  • 6.15 공동 선언 채택 후 북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를 들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저지시키려 했으나 한미 동맹관계를 지속시켜온 남한으로서는 민족공조를 우선시하기 어려웠다.

 

  •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서도 북한은 민족공조와 협력을 강조하였으나 남으로부터 적극적은 호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급격히 나아지지 않았으나 경제교역액은 큰 폭으로 증대했다.

 

  • 2007년 10월 4일 제 2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으나 2008년 2월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되었다.

 

  • 결정적으로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11월 연평도 사건으로 남북관계는 다시 냉전시대로 회귀했다.

 

 

– 심화조 사건(深化組 事件)

  • 90년대 말 김정일은 무너지는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심화조 사건’을 벌여 수천 명을 처형하거나 수용소로 보내는 대규모 숙청 사건을 일으킨다.

 

  • 심화조 사건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북한에서 발생한 대규모 숙청 사건이다. 1996년에서 1997년까지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대기근으로 인해 350만 명에 달하는 대량의 아사자가 속출했다.

 

  • 당시 북한의 김정일은 자신의 아버지였던 김일성 시대에 활동한 고참 간부를 취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정일은 사회안전성(현재의 인민보안성) 내에 비밀경찰 조직인 “심화조”를 설치했다. 심화조는 주민의 경력, 사상 조사를 심화시킨다는 뜻을 갖고 있었는데 특히 경제 위기와 대기근으로 인해 국민의 불만이 커진 점을 적극 이용했다.

 

  • 김정일은 당시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있던 장성택을 심화조에 기용했고 단숨에 고참 간부들과 측근, 이들의 친척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대숙청을 감행하게 된다.

 

  • 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농업 담당 비서로 있던 서관희는 대기근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평양 시내에서 공개적으로 총살을 당했다. 또한, 장성택의 정적이기도 했던 문성술은 장성택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 심화조의 거점은 전국 수백 곳에 달했으며 수사 담당 직원은 약 8,000명에 달했다. 최종적으로 숙청된 인원은 약 25,000명이었다. 이 가운데 10,000명은 피살당했고 15,000명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 북한의 경제 정책

  • 1998년부터 북한의 대규모 대자연 개조 운동을 벌린다. 내용은 수확량이 높다는 감자 재배를 대대적으로 장려했고 지역적으로 두벌농사(이모작)를 확대했다. 가는 곳 마다 닭 공장, 오리 공장을 짓고 양어장을 건설했다. 특히 에너지난을 해결하기 위해 중소형 발전소 건설을 대대적으로 내밀었다.

 

  • 그러나 이러한 경제 정책들의 실패를 인정하고 2002년 7월 처음으로 부분적인 시장경제의 성격을 띤 경제 개선 조치를 취했다. 그에 따라 2002년에는 신의주 특별행정구, 금강산 관광 지구를 지정하고 자본주의 경제요소를 받아들이는 법령들도 만들었다.

 

  • 한국의 햇볕정책으로 경제 상황이 좋아지자 2008년 김정일은 2012년 4월 15일 김일성의 탄생 100돌까지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총 진군을 선언했으나 2011년 12월 17일 강성대국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 북한에서 자본주의 요소 형성 확대

  • 북한에서 장마당은 단속을 피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원시적인 메뚜기장에서 시작하여 진드기장으로 변화하였다. 그 후 2000년대 초에는 장마당으로 제도화되어 갔다.

 

  •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류가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밀수 되었다. 장마당의 번영과 한류의 유입으로 북한에서 더는 ‘일한 것만큼 분배 받는다’는 사회주의 경제원칙이 사라지게 되었다. 장마당은 확고히 들어섰으며 ‘돈주’라고 불리는 자본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2009년 11월 김정일은 강성대국 건설의 일환으로 화폐 개혁을 단행했으나 한 달 만에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화폐 개혁의 실패는 북한 당국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었다.

 

 

2절 남한의 정세

 

–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외환위기 극복

  • 한국은 IMF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경제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그 어느 나라보다 빨리 경제위기를 극복하게 된다.

 

  • 하지만 금융 산업이 국제화되어 2000년대 초 시중은행의 절반가량이 외국계 은행이 되었다.

 

  • 경쟁력이 약화된 전통 제조업은 쇠퇴하거나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고, 그 대신 전자, 반도체, 조선 등 중화학 공업이 국가 경쟁력의 중심을 이루어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IT 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질 좋은 IT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었다.

 

– 세계화의 물결

  • 기술 진보와 함께 국제적인 분업이 이 시기에 재빠르게 확산됐다. 제트 비행기로 하루 안에 지구 반대편에 도착하고,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의 정보가 세계의 구석구석으로 신속하게 유통되었다. 이 같은 기술의 발전으로 기업은 전 세계를 상대로 투자, 생산, 판매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선진국은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후진국으로 제조업을 이전하고 있고 그 대신 선진국 경제는 지식집약의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바뀌었다.

 

  • 다국적 기업들은 여러 나라의 원료조건과 관세 조건에 따라 부품의 생산기지를 여러 나라로 분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의 경우 엔진과 몸체, 타이어를 여러 나라에서 생산한 다음 미국에서 조립한다. 또한, 중국은 선진국의 제조업 투자로 고용과 소득을 창출하게 되었다.

 

  • 세계화의 물결은 세계를 하나의 자유 시장으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WTO와 별도로 칠레, 싱가포르, 유럽연합 2007년에는 미국과 FTA를 체결했다.

 

– 한류의 확산

  •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문화가 세계에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힘들었던 북한 내부 사회에서도 남한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고, 평소에 생각도 못해보던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북한 내부에까지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 국제적으로 한류 붐이 형성되면서 한국인들에게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초중고 교생의 해외유학도 단계적으로 자유화 되면서 해외이민도 늘어났다.
    오늘날의 한국교민은 165개국에 678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3절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남의 낮은 단계의 연합제 안

 

여기서 주목할 것은 6.15 공동 선언에 들어간 북측의 주장인 낮은 단계인 연방제 안과 남측의 연합제 안이라는 표현 문제이다.

 

– 왜 김정일과 김대중은 서로 다른 표현을 썼을까?

〈6.15 공동 선언〉 제2항에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으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 이후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심각한 논란이 일어났다.

 

– 북한의 연방제 주장의 변화 과정

  • 김일성은 1980년 10월 노동당 대회 연설에서,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위에 민족통일정부를 세우고 이를 기초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을 수립한다.”며 고려연방제 창립방안을 주장했다.

 

  • 고려연방제와 낮은 연방제의 차이는, 고려연방제는 빠른 시일 내에 단일한 헌법을 제정하고 단일한 의회를 구성하자는 것이지만, 낮은 연방제는 단일헌법 제정과 단일의회 구성을 천천히 또는 전혀 시도하지 않고, 일단 “남북한만의 유엔”, “남북한만의 유럽연합”을 설립해서 함께 교류 화해하면서 상당기간을 살아보자는 의미에서, 고려연방제와는 차이가 있다.

 

  •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주한미군 주둔의 불가피성에 대해 이해를 표시하여 사실상 선결 조건에서 취소했다. 주한미군 철수가 선결 조건인 고려연방제와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낮은 고려연방제의 차이이다.

 

 

– 모순점

 

  • 원래 연방제의 군 통수권은 연방 대통령이나 연방 총리가 단독 보유하는데, 김일성의 고려연방제는 군 통수권을 남북이 현행대로 따로 보유하자는 것이어서, 이는 연합제이지 연방제가 아니다. 1973년 북한이 연합제와 연방제의 용어 차이를 혼동했던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 한국은 내내 연합제를 주장하며 북한의 연방제를 반대했고, 북한은 연방제를 고집하며 한국의 연합제에 반대했다. 둘 다 군 통수권은 남북한이 현행대로 따로 보유하자는 것이어서 둘 다 연합제를 주장하는 것이었고 다만 주한미군 철수만이 실질적으로 가장 큰 대립이었다.

 

  • 북한의 통일 방안인 낮은 단계 연방제는 기존의 고려연방제와 같은 높은 단계 연방제(前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방안과 달리 선결 조건(주한미군 철수, 국보법 폐지, 공산 활동 합법화)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결 조건이 없는 것이 바로 낮은 단계 연방제의 함정이다.

 

  • 남북한이 낮은 단계 연방제에 의해 통일을 하게 되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외국군(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된다.
    주한미군 철수 이후에는 국보법 철폐, 공산 활동 합법화 등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높은 단계 연방제로 귀결된다.

 

– 국가 연합과 연방 국가의 차이

  국가 연합 연방 국가
국제법상 주체 구성국이 각각 주체가 됨 연방 국가만이 주체가 됨
국가성 진정한 하나의 국가가 아님 진정한 하나의 국가임
결합의

근거

조약 연방헌법
대내적 통치권 연방정부가 없고 구성국 정부가 입법, 집행, 사법권을 나눔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입법, 집행, 사법권을 나눔
외교권 구성국 정부가 각각 보유 연방정부가 보유
국제적 책임 구성국 정부가 각각 책임 연방정부가 책임
병력의 보유 구성국 정부가 각각 보유 연방정부가 보유
결합의 안정성 잠정적 결합 영구적 결합
대표적 사례 독립국가연합(CIS), 유럽연합(EU),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미국(1787년), 스위스(1848년), 캐나다(1867년), 독일 연방(18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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