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동서독 통일과 동구권 몰락에서의 교훈

1. 개요

– 현재 북한에서 벌이는 자국 내 정책은 과거 동독과 동구권 국가에서 펼쳤던 정책들과 상당 부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결말은 동독의 경우 서독으로의 연방제 가입식 흡수 통일이었고, 동구권 국가들의 경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이었다. 소련의 경우는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소비에트 연방국가의 해체와 각 공화국의 독립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보았을 때 북한 역시 이들의 수순을 따를 것이라는 판단이 들기 쉽지만, 아직까지도 북한 체제는 무너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의 이들의 과거 역사의 흐름과 자유진영에서의 행동 등을 알아볼 의미가 있다.

2.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의 경험

– 서부독일의 동부독일에 관한 정책

  • 서독의 총리 브란트는 아데나워 총리 이래로 독일 정부가 고수하고 있던 ‘동독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와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였다. 적극적으로 공산권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동방정책’을 표방하였다. 이는 독일을 기준으로 나뉘어 있는 서유럽의 자유진영과 소련 및 동구권 공산진영의 긴장관계를 완화해주는 큰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동독과의 경제 협력과 교류, 지원을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는 동독의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을 요구하였다는 점이 핵심이었다. 철저한 상호주의에 입각해 교류를 했던 것이다. 동독의 지원 요구에 서독은 주민들에게 서독 방송 시청을 허가 해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물론 동독은 크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경제 악화로 인해 재차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였고, 그때마다 서독은 같은 조건을 내걸었고 마침내 동독은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통해 동독 정부는 주민들에게 들어가는 정보 유입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의 발전된 경제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고 국제 정세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국가의 선전 선동은 효과가 없게 되었고 동독 주민들의 서독 사회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다.

 

  • 북한 정권에서는 동독의 사례를 통하여 외부 정보의 유입은 사상을 약화시키고 선전 선동을 어렵게 하여 자신들의 뜻대로 인민들을 움직이기 힘들어진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서독의 잘 사는 모습을 보고 동독 주민들의 마음에 생긴 ‘동경’이라는 심리적 변화를 크게 주의하였다. 비사회주의적인 모든 것을 검열한다는 취지로 비사그루빠, 109상무, 1118상무 등을 운영하고 남조선 드라마, 영화 등과 같은 매체를 접하는 것을 큰 죄로 본다는 점이 그 증거이다.

 

  • 또한, 서독의 상호주의는 프라이카우프(freikauf)로 이어졌다. 프라이카우프는 ‘자유를 산다’는 뜻으로, 가장 자유를 억압하고 인권 피해가 심했던 정치범들을 대상으로 서독의 지원금과 동독의 정치범을 맞교환하는 정책이었다. 이를 통해 동독의 인권 상황을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었고 동독의 정치범과 가족 약 3만여 명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

 

  • 이 역시 북한 정권에서 크게 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이다. 북한 정권의 민낯을 잘 알고 있고, 인권의 불모지에서 살고 있는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하거나 언급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한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치범이나 수용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남북한의 경우 정치범 이외에도 ‘한국식 프라이카우프’를 진행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바로 수많은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는 매년 쌀이 부족한데, 남한에서는 매년 수확량이 넘쳐나서 보관을 하는 창고에서 썩는 경우도 생기고 보관료로 엄청난 돈을 지불하기도 하고 있다. 돈과 같은 직접적인 경제 원조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비용이 생기는 부분을 줄이기도 하면서 만 톤에 1명과 같은 조건으로 협상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렇게 이십여 년 동안 한 결 같이 추진된 동방정책과 철저한 상호주의는 브란트와 슈미트 총리를 지나 헬무트 콜 총리까지 오게 된다.

 

 

– 통일독일을 위해 주변 국가에 펼친 정책

  • 서독의 콜은 동독의 인근 공산권 국가와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협상의 요지는 같은 동구권 국가끼리는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동독과 맞닿아 있는 헝가리와 체코를 설득하여 오스트리아로의 국경을 열게 하는 것이었다. 동독 주민들은 헝가리와 체코로는 쉽게 넘어올 수 있었고 서독으로는 넘어올 수 없으니 같은 자유진영의 오스트리아로의 유입을 유도하여 서독으로 들어올 수 있는 루트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이 정책을 통해 대대적인 동독 주민들의 이탈 현상이 발생하였고, 결국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된다.

 

  •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동서독의 통일에서 가장 결정적인 점은 바로 주민들의 이탈 현상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북한에서는 생존, 자아실현 등 다양한 이유로 탈북을 하고 있다. 북한 정권 역시 이 점을 알고 있지만 사회 여건상 전부 막고 있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탈북자들을 불법 체류자로 간주하여 다시 북한으로 보내달라는 북송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가장 많은 탈북민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중국이다. 한국 정부가 중국과의 협상에서 탈북민이 중국에서 한국행을 요구할 때 바로 남한으로 보내주는 루트를 만들고 유지해달라고 한다면 북한 역시 대대적인 탈북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드 배치와 관련해서 중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에 이런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다.)
    중국 역시 인권 탄압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큰 손해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 또한,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 가장 큰 문제였던 독일의 국경선을 현재의 영토로 한정한다는 약속을 주변국들에게 담보하였다.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던 과거 독일에 대한 반성과 지배를 당했던 피지배국들의 걱정을 단숨에 신뢰로 바꾼 것이다. 이와 함께 나토의 동독전개를 불허하겠다는 것을 소련에 담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돈으로 이전 소련군을 독일에서 철수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럽연합의 틀 안에서 유럽의 통합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약속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동의까지 얻어내었다.

 

3. 동구권의 몰락 과정에서의 경험

– 동구권의 몰락과 공산주의의 실패

  • 북한과 같은 독재체제였던 루마니아 차우세스크 체제는 갑작스럽게 붕괴되었다.
    반체제 지도 역량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들의 의식이 쉽게 변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공산주의권이 무너진다는 교훈을 보여 준 사례였다. 불만이 있어도 이야기를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를 예측할 수 없었던 공산 시스템의 본질적인 구조적 결함이었던 것이다. 폴란드에서는 연대성 로조운동과 카톨릭의 결합으로 사회주의 제도를 붕괴시켰다.

 

  • 공산권의 대부로 불리는 소련마저도 80년대 말 고르바초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힘의 우위에 의한 지나친 국부 경쟁과 동구권 공산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 등을 겪으며 소련도 많은 변화를 감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기나긴 냉전 시대를 마치며 결국 91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해체를 선언하게 된다. 각 공화국의 강제적인 독립과 공산주의의 포기를 선언한 소련은 중국의 등소평과 같이 개혁 개방을 시작하게 된다.
    동구권과 소련의 사회주의 포기는 엘리트층도 체제가 변하면 더 좋은 삶이나 출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들도 결국은 돌아서게 된다는 교훈을 준다.

 

  • 북한은 동구권의 몰락과 소련의 해체를 보며 큰 충격을 받았지만 사상과 체제에 대한 선전을 더 열심히 하였다. 소련마저도 포기한 공산주의를 북한은 승리가 머지않았다고 재차 선동하였다. 사회 내에서의 활동이나 종교와 같이 단체로 쉽게 모일 수 있는 행위들을 금지하였고 그러는 동안에도 사상에 대한 교육과 세뇌를 멈추지 않았다. 또한, 주민들을 서로서로 감시하는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수령-당-인민의 굴레를 각인시켰다.

 

4. 결론

– 통일 당시 동독 주민들의 생각

  • 당시 동부독일의 사회복지체제는 사회주의권내에서 최고 수준이었지만, 동독의 일반 주민들은 작은 백화점보다 슈퍼마켓을, 소련산 볼가보다는 서독제 메르세데스 벤츠를 선호했다. 방송 속 서독의 자유로움과 번영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이는 타 동구권 국가가 느끼지 못하는 같은 민족이지만 같은 번영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과 자존심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들은 통일이라는 마음 속 염원의 불씨에 불을 지폈고, 서독의 여러 정책들은 기름을 부어 통일을 이뤄냈다.

 

  •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이제는 남한의 경제력이나 사회가 더 안정적이고 번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 마음속에도 통일에 대한 염원이 있을 것이고 점차 불이 붙고 있을 것이다. 이들을 도와서 통일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던 남한 정부에서 추진할 수 있는 정책들도 있을 것이고 곧 있으면 시작될 남북 교류 사업 등에도 해법이 존재할 것이다.
    브란트 총리가 말했던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는 작은 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게 낫다.”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내딛을 작은 걸음 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