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동행 아카데미] 제4장 80년대부터 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까지 남북 통일정책 비교

제1 절 북한 정세

 

– 당 제6차 대회

  • 1980년 10월 북한은 당 제6차 대회를 개최하였다. 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사회주의 완전 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과업을 제시하였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제적으로 모두가 평등으로 사는 사회를 뜻하는 것이었다. 또한, 물질적으로 근심 걱정이 없는 사회를 지향하였다.

 

  • 다음으로 남북한 통일 방식으로써 연방제를 선포하였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지역 정부 위에 중앙 정부를 두어 민족의 전체적인 문제를 공통적으로 다뤄보자는 방식이었다. 김일성은 오랫동안 세월이 흘러가면 남과 북의 차이가 점점 줄어들면서 결국에는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남과 북의 체제 통일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마지막으로 김정일의 후계구도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권력의 이양을 완전히 마무리 지었다. 김일성은 점차 상징적인 존재로, 허수아비로 되어 버렸다. 이후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주체사상을 한 단계 더 완성시켰다.

 

– 정치

  • 김정일은 1982년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와 사회역사 원리, 그리고 지도적 원칙을 밝히면서 수령-당-인민이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되어 있다는 새로운 논리를 발표했다.

 

  • 결국 대중은 생명의 은인인 수령에게 충성과 효성을 다하고 수령은 인덕정치를 수행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북한 사회를 점차 개성과 다양성이 없는 사회로 만들게 되었다.
    1970년대에 ‘당 중앙’이라는 기묘한 명칭으로 불리던 김정일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는 공식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 경제

  • 한정적인 자원과 인력 때문에 자력갱생이 불가능했지만, 인민에게 물질적인 동기보다는 사상을 강조하여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려 하였다. 특히 건설 사업에 대중을 동원하여 건설하는 방식을 주로 이용하게 되었다. 건설 기업소에서 근무하는 전문적인 일꾼들에게 건설업을 맡겨야 했지만, 경제가 기울기 시작했던 당시에는 일꾼들의 인건비를 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대중동원 방식으로 80년대부터 평양산원, 주체사상탑, 개선문, 인민대학습당, 문수거리 등 대규모 건축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20리(약 8km) 바닷길을 막는 서해갑문의 건설은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할 정도였다.

 

  • 하지만 대중동원 방식은 큰 문제점들이 존재했다. 당원 돌격대라는 명칭으로 건설 구역별로 지역, 기업소, 기관 등에게 건설을 배당하여 건설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꾼들은 건설업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따라서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졌고, 그에 따라 건축물의 안정성은 보장되지 못 하였다. 마지막으로 대규모 공사에서 자재의 엄청난 낭비를 불러왔기 때문에 1978년~84년 사이에 공업 총생산액은 2.2배로 늘어났다고 발표했으나 85년부터 경제상황이 둔화되는 것이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경제 부문의 망조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 남한과 북한은 같은 중화학 공업 노선을 채택했지만, 에네르기(에너지)를 수급하는 데 있어서 큰 차이를 보였다. 남한은 자국에는 한 방울도 없는 석유를 수입하여 석유화학공업을 발전시키고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였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큰 무리가 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반대로 북한은 지천에 널린 탄(석탄, 무연탄 등)을 이용하여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 심지어 이승기 박사의 비날론(석회석과 무연탄을 이용하여 만든 천연 화학섬유) 발명은 북한 인민에게 엄청난 힘을 실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형의 융기, 침식 과정이 심했던 한반도에서 석탄층은 탄맥이 끊겨 있었고, 기계에 의한 대량 채굴이 어려워 탄을 이용한 발전이 더디게 되었다.

 

– 대외 관계

  •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특색 있는 사회주의 건설은 점차 중국식 시장경제 건설로 변모하였다. 중국은 공산주의 사상을 오직 주민 통제용으로만 쓰고 주민들에게 3가지 자유를 보장하였다. 즉, 정보접근 자유, 이동의 자유, 정치조직생활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대학에서 박정희의 개발독재 경제학을 가르칠 정도였다.
    80년대 말 등장한 소련의 고르바초프도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중국의 등소평과 정치의 민주화를 우선적으로 밀고 나갔다.

 

  • 이러한 공산권의 두 대국의 행보는 북한으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불안감을 주었다. 북한은 주민들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북한만은 사회주의 완전승리가 눈앞에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84년 소련과 동유럽을 돌아본 김일성은 유럽의 눈부신 발전에 큰 충격을 받는다.

 

– 대남 정책

  • 79년 10월 26일 남한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전부터 남한의 지도자만 없으면 통일을 쉽게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북한은 큰 기대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어서 발생한 79년 12.12 쿠데타, 80년 5.18 광주 민주화 투쟁(북한에서는 광주 인민 봉기), 특히 82년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은 북한에 반미 민족주의를 들고 나가면 금세 통일이 될 것만 같았다.

 

  • 북한은 68년 1.21일 청와대 습격 사건(한국에서는 김신조 사건)처럼 독재자 전두환만 제거하면 한국이 다시 혼란에 빠지고 제 2, 3의 광주가 생길 것이라고 또 다시 오판하게 된다. 그리하여 83년 10월 9일 북한은 버마(현재의 미얀마) 랑군(현재의 양곤)에서 아웅산 묘소를 방문할 예정이었던 전두환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로 인해 북한은 국제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 북한의 도발을 잠시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전두환은 84년 남한에서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북한의 지원을 전적으로 수락하게 된다. 이때 최초로 이산가족 상봉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 그런데 80년대 후반기 소련에서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전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중국과 소련은 한국에 대한 접근을 증대 시키면서 한국과의 무역을 대폭 늘린다. 게다가 한국은 88 서울 올림픽을 주최하고 온 동구권의 공산국가들을 초청하였다. 중국 등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이 북한의 불참 요구를 무시하고 처음으로 올림픽 대표단을 적대 국가였던 자유 진영의 대한민국, 서울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 급격히 생겨난 평화적인 분위기에 극도의 불안에 빠진 북한은 마지막 수단으로 87년 KAL 폭파사건을 일으켜 올림픽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서울 올림픽은 역사상 처음으로 동서화합의 축제가 되었고, 북한은 더욱더 국제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 불안감에 휩싸인 북한은 87년 제13차 세계 청년학생축전을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2년 동안 나라의 모든 재정을 쏟아 붓게 된다. 이때부터 북한경제는 완전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세계적 평화와 반대로 가던 북한은 80년대 말부터 소련에게서 받던 무상 경제군사 원조가 끊기게 되었고, 90년 9월 한국-소련의 수교와 92년 8월 한국-중국의 수교 역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90년 10월 3일 동서독일의 통일은 북한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이후 국제 사회의 압박과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해 91년 9월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게 된다. 3개월이 지난 91년 12월, 이전 소련은 붕괴되고 동구권 사회주의는 최종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제 2절 남한 정세

– 정치

  • 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가 정권을 차지하며 신군부 독재를 이어갔다. 이에 반발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이듬해 81년 2월 전두환은 정식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 신군부 독재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83년부터 전두환 정부는 저항세력과 유화국면을 조성하게 된다. 85년부터 사상과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였고 김영삼, 김대중 등의 민주화 정치세력과 시민들은 계속해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해 나섰다.

 

  • 전두환 정권은 87년 4월 13일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호언 조치를 발표하였다. 즉, 대통령 직선제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88 올림픽을 대비하여 개헌을 논의하는 것은 국론을 분열하고 올림픽에 집중하지 못 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호헌 조치를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하였다.

 

  • 이런 상황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야할 경찰의 고문으로 시민이 죽게 되었고, 심지어 이를 은폐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학생시위에 참가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6월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 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 방식을 직선제로 교체하고 정치권은 평화적, 개량적 방법으로 국가체제를 민주주의 체제로 개선하기로 합의한다. 88년 2월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전두환은 한국 헌정사는 물론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후임자에게 단임의 약속을 지키고 자리를 물려준 대통령이 되었다.

 

  • 제5공화국에서 제6공화국으로의 평화적인 이행은 이전까지는 전망이 불투명하던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순조롭게 정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가 점점 민주화되면서 이에 따라 80년대 말 반미, 반파쏘(파시즘, 파쇼)와 같은 구호를 내건 주사파와 같은 급진좌파세력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한은 이런 민주화 과정을 보고 한국에서도 적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제

  • 전두환 정부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산업합리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중화학 공업을 무리한 추진을 잠시 멈추고 중소기업 육성에 달라붙었다. 특히 정부는 계열화촉진법을 만들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부품을 중심으로 한 계열, 하청 관계를 장려하였다.

 

  • 북한과 달리 석유화학 공업을 발전시키고 석유 자원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한 남한은 85년 배럴당 28달러였던 유가가 86년에는 15달러로 떨어지자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한국 공업제품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로 인해 87년 성장률은 무려 12.3%에 달하게 되었다.

 

  • 하지만 계열화촉진법은 산업 성장을 위한 집중을 함과 동시에 대기업 위주의 경제 발전으로 건강하지 못한 산업 생태계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경제 안정을 명분으로 노동 운동도 탄압하였다.

 

제 3절 국제 정세

– 통일 전까지 수십 년 동안 동방정책과 상호주의를 꾸준히 결합한 서부독일 정부

  • 서부독일 총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기존의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적극적으로 공산권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동방정책’을 표방하였다. 이로 인해 소련 및 동구권 공산권 국가와의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커다란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핵심은 동독과의 경제협력과 교류, 그리고 인권문제 개선을 결부하였다.

 

  •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콜의 상호주의로 계승되었다. 이를 통해 대대적인 동독 주민 이탈현상 조성하여 결국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헝가리와 체코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열게 하여 동독 주민들이 서부 독일로 넘어가게 한다.

 

– 통일 전야 외부와의 관계를 능숙하게 해결한 서부독일의 통일경험

  • 가장 큰 문제인 독일의 국경을 현존 선에서 인정한다는 것을 주변국들에게 약속하였다. 또한, 돈으로 이전 소련군을 독일에서 철수시키고 나토의 동독전개를 불허하겠다는 것을 소련에 담보하였다.

 

  • 유럽연합의 틀거리 안에서 유럽통합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약속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동의를 얻는다.

 

– 당시 동독 엘리트들과 주민들의 서로 다른 생각

  • 동독의 일반 주민들은 작은 백화점보다 슈퍼마켓을, 소련산 볼가보다는 서독제 메르세데스 벤츠를 선호했다. 당시 동부독일의 사회복지체제는 사회주의권내에서 최고였음에도 서독의 사회를 선호하였던 것이다.

 

  • 동서독의 통일은 완전한 자유민주주의의 흡수통일이 아니라 좀 더 개방된 사회주의제도의 완성이었다. 그들 중에는 여전히 생산 수단의 사적소유를 반대하는 세력이 아직도 독일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동독 엘리트들에게는 통일독일 사회에서도 출구가 있었다.

 

– 동유럽에서 사회주의제도 붕괴

  • 루마니아 차우세스크 체제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반체제지도 역량이 준비되지 않아도 주민들의 의식만 변하면 공산주의권이 무너진다는 교훈을 보여 주었다. 불만이 있어도 이야기를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를 예측할 수 없었던 공산 시스템의 본질적인 구조적 결함이었던 것이다.

 

  • 폴란드에서 연대성 로조운동과 카톨릭의 결합은 사회주의제도를 붕괴시켰다.

 

  •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는 엘리트층에 제도가 변하면 더 좋은 삶이나 출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들도 돌아선다는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