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남북 공동성명 배경과 의의

1. 7.4 남북 공동성명 배경

– 배경

  • 공산 진영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개혁개방 운동인 프라하의 봄,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어느 사회주의 국가든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등으로 인해 공산권의 분열이 초래되었다.
  • 자유주의 진영은 닉슨 독트린으로 핵 문제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1차적 방위책임을 진다는 등 자유 진영에도 위기감이 들었다. 한반도에서는 미군의 부분 철수, 미중의 화해 무드로 양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남북은 변화하는 국제 정치 환경에 적응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 대한민국의 경우 당시 박정희가 이끌던 제3공화국의 정치적 위기가 가장 큰 배경이었다. 전태일 열사 사건 등 대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 7.4 남북 공동성명의 배경인 닉슨 독트린과 서부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

  • 1969년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이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는 공산주의화를 막고자 노력했던 트루먼 독트린의 폐기를 의미한다. 이어서 서독의 새로운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사민당 소속)가 동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동독에 대한 강경책이었던 할슈타인 독트린의 폐기를 의미한다.

 

  • 1970년 이러한 세계적 물결에 힘입어 동독과 서독이 동서독 정상 회담을 하게 되었고,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현재 중국) 사이의 핑퐁 외교도 시작되었다. 71년 유엔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엔의 새로운 중국 대표로 인정하고, 중화민국의 대표권을 상실하는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를 채택하였다. 사실상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닉슨 독트린

  • 영어로 Nixon Doctrine 또는 괌 독트린(Guam Doctrine)은 미국 대통령 닉슨이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발표한 외교 정책이다. 1970년 2월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닉슨 독트린을 세계에 선포하였다. 닉슨 독트린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1.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2.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 여러 나라들)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무기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3.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 군사적 또는 정치적인 과잉 개입은 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각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4. 아시아의 각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 중심으로 바꾸며 여러 나라 상호 원조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5. 아시아의 각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 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기반으로 한국은 미군에 기대어 군사적으로 덜었던 안보의 부담을 갖게 되었다.

 

2. 7.4 남북공동성명 내용 분석

 

– 7·4 남북 공동 성명(7·4 南北 共同 聲明)은 1972년 7월 4일 대한민국과 북한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 1972년 박정희의 지시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북한에 파견되어 김일성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제정하였다.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주한미군 철수선언, 군비경쟁 축소를 위해 제정되었으나 이후 통일논의를 통해 남북 양측이 자국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다.

 

–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남북의 서로 다른 이해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하지만 공동 성명에 대해 남북 간 해석 차이가 있었다.

 

자주: 대한민국은 남북이 당사자가 되어 민족문제를 해결해 나가되,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토대로 하는 열린 자주로 해석하였고, 북한은 외세 배격을 통한 배타적 자주로 해석한다.

평화: 대한민국은 북한의 무력도발 포기와 상호 불가침으로 해석하였고, 북한은 남한의 자주 국방력 강화에 제동,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을 원했다.

민족 대단결: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의 바탕에서 민족적 이질화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북한은 남한의 반공정책 포기, 국가보안법 폐지를 원했다.

 

– 7. 4 남북 공동성명의 의의

 

  • 남북의 두 정권이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최초의 합의로서 의의를 가진다. 최초의 남북회담이다. 또한 기존의 외세 의존적이고 대결지향적인 통일노선을 거부하고 올바른 통일의 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한편 이는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어져 6·15 남북 공동선언으로 계승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3. 7.4 남북 공동성명 후의 북과 남 정세 비교

 

– 북한

  • 북한에서 1970년대 말은 경제적으로 마지막 번영기였고 정치적으로는 김정일의 후계구조 과정이 들어서면서 점차 망조의 시작을 초래했다.
    1970년 북한은 당 제 5차 대회에서 사회주의 공업화를 1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수했다고 발표했다. 동북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북한이 공업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사회주의 무상치료제와 9년제 의무 교육을 실시했는데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복지국가를 수립했다.

 

  • 정치적으로는 김정일의 후계구조가 점차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체사상은 북한의 지도사상으로 맑스-레닌주의를 대체했다. 원래 주체라는 말은 55년 12월 28일 김일성이 당 선전선동원대회에서 ‘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김일성이 주체라는 표현을 들기 시작한 것은 55년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주의를 비판한 것과 관련된다.
    이후 68년 김일성은 황장엽 등 4명에게 주체사상이라는 사상을 만들 것을 지시한다. 주체사상이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다고 하면서도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역할을 다 하려면 수령의 영도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서 인민대중으로부터 결정권을 수령에게 넘겼다.

 

  • 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의한 반대파 숙청과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의한 일색화가 진행되었다. 김일성체계는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에 정적숙청과 유일사상 체계 확립, 세습으로 대응하였다.
    김정일은 73년 9월 당 중앙위원회 비서로, 74년 2월 13일 당 정치국위원으로 선거되어 당 내적으로 공식 후계자의 자리에 오른다.

 

  • 소련이나 중국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은 김일성은 김정일을 후계자의 자리에 앉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고 후계자의 지위를 확실히 규정해 놓기 위한 구조가 필요했다. 바로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다.
    김정일은 10대원칙에 따라 수령님의 교시가 제대로 관철되는지 감시하기 위하여 당 생활총화 제도를 내왔다.
    74년부터 김일성은 당 중앙의 유일적 지도아래 모든 당 조직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규율을 세우라고 지시했는데 이것은 김정일에게 공식 권한이 넘어간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북한은 첫 남북 간 대화의 물꼬를 튼 분위기 속에 72년 말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여 주체사상을 북한의 지도사상으로 확립하고 김일성 주석제도를 내왔다.

 

– 한국

  • 1972년 10월 박정희대통령 유신헌법 개정을 선언한다. 5.16에 이어 또 하나의 정변을 감행하여 유신체제에 들어가게 된다. 현재의 국가 체제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의 변화와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새롭게 시작된 남북 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유신체제란 국가의 최고 주권기관을 통일 주체 국민회의로 하고 여기서 대통령을 선출한다. 유신체제는 7년간 존속했는데 어떠한 국가기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대통령의 절대 권력을 성립시켰다. 대의 민주주의 정치 원리는 소멸되고 박정희의 종신 집권이 사실상 보장되었다.

 

  • 68년 이후 북한은 남한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강화하고 69년 닉슨 독트린에 따라 미국은 70년 한국정부와 상의 없이 주한 미군의 3분의 1을 철수할 계획을 발표한다. 72년 미국과 일본은 중국과 수교한다. 이러한 시기 박정희는 노동 집약형 경공업을 대신하는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할 의지를 표명한다. 박정희는 자신에게 집중된 행정 권력을 총동원하여 자주 국방과 중화학 공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 경제 건설에서 중화학 공업화에 들어선다. 박정희는 새로 건설되는 공장이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최신 기술을 도입하고 공장도 대규모여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이러한 원칙에서 한 분야에서 한두 기업체를 선정하고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공장부지, 도로, 설비자금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이 같은 산업, 기업정책은 기회의 균등을 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는 합의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중화학 공업이 성공한 것은 유신체제가 정치가 경제에 개입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차단했다.
    북한과 다른 점은 전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정부이지만 실제적으로 공장을 건설하고 제품을 생산하여 해외시장에서 판매를 한 것은 민간 기업이다. 민간 기업은 당초 성공 가능성이 의심스러워 주저했으나 박정희의 강력한 정책의지에 의해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선다.
  • 중화학 공업 건설노선은 난관적인 실적을 거둔다.
    1973~1979년 기간 한국제조업은 평균 16.6% 경이로운 성장률을 기록한다.
    1977년 말 한국은 수출 100억 달라 목표에 도달한다.

 

– 박정희의 6.23 선언을 통한 통일 정책

  • 1973년부터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인당 국민소득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신감에 기초하여 6월 23선언을 발표한다.
    박정희는 약칭 6·23 선언을 통해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공산주의 국가에의 문호 개방 등을 선포한다.
    1973년 6월 23일 저녁에 조국통일 5대 강령 (조국통일 5대 방침 또는 조국통일 5개 방침) 을 발표했다.
    이 강령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2개의 한국 정책이며, 이는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