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동행 아카데미] 제 3장 7.4 남북 공동성명 채택 배경과 향후 정세 발전

1. 7.4 남북 공동성명 배경

 

-배경

  • 공산 진영에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개혁 개방 운동 ‘프라하의 봄’은 여기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에 의하여 무참히 진압 당하게 된다. 일명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어느 사회주의 국가든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 때문에 80년대까지 평화적인 민중 봉기를 통한 혁명은 어렵다는 인식이 생겼다.

 

  • 김일성은 베트남에서 유격대 활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남한에서도 공산당 게릴라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활동이 없자 북한에서는 위장 유격대 활동을 벌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1968년 1월 21일 특수 부대 요원 30명을 남한에 파견하는 김신조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북한에서는 남한의 체제에 대한 반항으로 유격대 활동이 청와대 앞 200m 까지 갔다고 방송하였다.

 

  • 하지만 당시 남한 국민들의 인식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 성장에 집중하는 정책으로 인해 체제 경쟁보다는 돈을 버는 데에만 온 신경을 두고 있었다.

 

  • 닉슨은 아시아에서 미국이 발을 떼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미국은 실제로 74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중국과 키신저를 통한 비밀 외교를 진행하고, 동맹국이었던 대만을 포기한다. 이러한 정세는 남한에게는 엄청난 안보적인 부담을 갖게 되었다.

 

  • 박정희는 북한이 정세를 오판하여 남한을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김일성은 남한에서 미국을 내몰기 위한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회담을 진행하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남북한의 반응

  • 7.4 남북 공동성명은 남북한의 통일을 위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남북한 지도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맺어지게 되었다. 당시에 남한 이후락을 대표로 하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북한을 방문하였고, 북한에서도 남한을 방문한 여러 대표단들이 각각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 6.25 전쟁 이후 첫 공식적인 방문이자 교류였다.

 

  • 북한의 현실을 본 남한 대표단들은 평양시가 깨끗하고 김일성의 한 마디에 온 구성원이 움직일 수 있는 조직화된 사회라고 묘사하였다. 이런 북한의 상황은 박정희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하면 내부로부터 결속시키고 단기간 내에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고안해내었다. 민주주의를 통한 상호 간의 의사소통을 통한 결정이 아닌 북한처럼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사회 변화와 산업화를 시도하려 한 것이다.

 

  • 남한의 현실을 본 북한 대표단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겉으로는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도로에는 차들이 가득하고 상점에는 물건이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남한의 경제가 북한이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발전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남한의 경제력은 16.7%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김일성은 처음에 우습게 봤던 군부 독재 정권을 쉽게 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 수령 독재 세습 통치의 시작

–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 남한과의 작은 교류를 통해 남한의 경제력과 잠재 성장력을 본 김일성은 1970년 조선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북한은 공업화가 완성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남한에서는 아직 산업화가 진행 중이지만 북한은 끝냈다고 선포하며 경제적 우위를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김일성은 공산주의 최초로 세습통치를 시도하였고 이때부터 북한은 악순환의 길을 걷게 된다.

 

  • 공산주의 이론에 맞지 않는 세습통치를 이뤄내기 위해서 김정일은 이미 있던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세습에 유리하게 개정한다. 이 10대 원칙을 통해 김정일은 우선 유일사상, 김일성의 사상만 존재할 수 있는 북한을 만들어 내었다. 두 번째는 혁명은 대를 이어서 수령의 후계자에 의해 계승된다는 이론을 만들어 수령의 사상을 제일 잘 알고 몸에 체언한 사람 즉 김일성의 아들이 후계자라는 사상이 점차 북한사회에 퍼지게 만든다.

 

  •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만든 후 북한과 남한의 운동장은 기울기 시작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개성이나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며, 북한에서는 무조건 주체사상만 존재한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 결정을 책임지고 도움 주는 것은 수령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는 수령이 행사해준다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모든 결정과 개인의 의사 표현을 자제하게 되었고 사회의 건강성을 잃어가게 되었다.

 

  • 또한, 주체사상은 수령이 곧 국가의 존망이기 때문에 수령의 건강은 북한이 다른 나라보다 더 잘 살 수 있게 해주고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사상에 기초한다. 따라서 70년대부터 수령 우상화 작업을 위한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게 된다. 전국적으로 동상, 만수무강 탑, 연구소 등을 세웠고 이런 불필요한 일에 투입된 막대한 자본은 점차 북한 사회의 성장을 둔화시켰다.

 

– 70년대 남북한의 경제 구조 차이와 변화

  • 김일성의 수령 독재 체계에 의해 권력을 이양 받게 된 젊은 김정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권 유지를 위한 수령 우상화 작업은 지속되었고, 즉흥적인 지시를 많이 하였다. 전문가들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계획했던 공사 작업도 묵살시키는 사회를 만들게 된 것이다. 나라의 경제는 뒤죽박죽되기 시작했다.

 

  • 김정일은 아직 자기 아버지 김일성이 국가 주석이기 때문에 김정일이 돈을 함부로 쓰지는 못하니 당 경제를 이용하여 주요 경제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나라의 경제가 통일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산만하게 관리되기 시작하더니 점차 북한의 경제는 기울기 시작했다.

 

  • 반면 똑같은 독재 상황, 똑같은 중화학 공업 주도의 발전 상황을 가졌던 한국은 70년대를 통해서 엄청난 차이를 가지게 된다. 남북한의 단 하나의 차이는 경제 성장의 주체였다. 북한이 국가 주도의 경제를 추구했다면, 한국의 정부는 국가의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민간 기업의 투자나 지원을 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이 차이는 60년대 초, 1억 불도 안 되던 한국의 수출액은 불과 십여 년 사이에 수출 100억 불을 돌파하게 하였다. 이는 북한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러한 격차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북한은 점점 더 폐쇄적인 사회로 만들어 갔다.

 

  • 또한, 70년대 초 북한에서는 엄청난 주민 통제가 시작되었다. 주민 이동의 자유를 금지하여 통행증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지역 간의 주민 이동을 차단하여 정보 이동을 차단하고, 주민들을 집단에 속하게 하여 생활 총화 등을 이용하여 지속적인 사상 검증과 감시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성분 제도를 내놓아서 학업, 거주 지역, 직업 등의 모든 차별 구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