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동행 아카데미] 제2장 6.25 전쟁부터 7.4 남북 공동성명 전까지 역사적 기간 및 남북 통일정책 대비

제1절 6.25 전쟁 후 북한 현실

– 1953년 7월 27일, 한반도에서 6.25 전쟁은 끝이 났다. 6.25 전쟁이 끝나면서 지금의 휴전선은 38선과는 많이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에 대한 원인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 첫째, 서부 전선을 중공군이 맡아서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전쟁할 때 중공군과 북한군이 병력을 구분해서, 서부전선은 중공군이 맡고 동부전선은 북한군이 맡아 전투에 임하였다. 남쪽에서도 서쪽은 유엔 연합군이 맡고 동쪽은 국군이 맡았는데, 유엔군의 서부 전선에서의 패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군의 승리는 휴전선의 동쪽 지역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 둘째 원인은 바로 여기, 서울 때문이다. 1948년도에 남한은 대한민국,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만들고 서로가 ‘민족의 적자’라는 정통성을 주장해왔다. 북한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울 당시 헌법상의 수도는 서울이었다. 따라서 6.25 전쟁 때 북한 헌법의 수도 역시 서울이었다. 수도 서울을 무조건 차지해야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다른 곳은 차지 못 한다고 하더라도 서울의 어느 한 구역 하나 쯤이라도 차지하고 있어야 결국 수도를 우리가 차지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서울 점령을 위해 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이것이 서쪽 지역이 상당히 많이 내려온 이유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북한은 1972년까지 헌법상 수도를 서울이라고 했고 평양은 ‘혁명의 수도’라고 했다.

추가적으로 중공군이 북한군보다 인원도 많고 화력도 센 이유도 있었다.

 

–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남과 북은 모두 다 지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남과 북은 전쟁을 끝내려고 하였다.

북한에서는 종전이 다가옴에 따라서 전쟁의 실패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북한은 전쟁을 일으킬 때 속전속결로 전쟁을 하여 큰 피해 없이 끝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인차(일찍) 끝낼 줄 알고 전쟁을 했는데 3년 동안 전쟁을 하고 보니까 온 나라는 다 잿더미가 됐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남은 게 없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희생양을 하나 잡아야 했다.

 

  • 여기에 첫 번째 희생양은 남로당의 수장, 박헌영이었다.

6.25 전쟁 전까지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여기(남한)에 있던 수많은 남로당원들이 과업을 수행하였는데, 박헌영을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낙인찍었다.

제일 처음에 박헌영을 내리 치면서 북한 군, 당, 행정 요직에 있던 남로당 출신들이 북한의 주요 요직에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남로당 박헌영이 북한에서 김일성 다음으로 2인자였는데,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었던 박헌영을 치면서 박헌영 밑에 있던 모든 남로당을 숙청했다. 그들은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직위를 내려놓고 사회에 나오게 되었다.

 

  • 두 번째는 최용건을 쳐내었다. 6.25 전쟁에서 속전속결하지 못한 원인은 서울에서 북한군이 3일 동안 술 먹고 놀았기 때문이라고 김일성은 주장했다.

6월 28일에 한강을 도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7월 1일에 한강을 넘어갔는데, 이 문제에 대해 당시 전선 사령관이었던 최용건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후 최용건은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북한군의 2인자로 있었지만, 당 회의에서 발언권이 없었다. 나라를 통일 못한 책임을 최용건에게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거물이었던 두 적수를 김일성은 6.25 전쟁을 통해서 제거해버린 것이다.

 

-1950년대 후반기에 들어선 김일성은 두 가지를 진행하였다.

  • 하나는 정치적으로 자기의 유일 독재 체제를 수립하려고 하고, 하나는 북한에서 경제적으로 생산 단계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진행하였다.

개인에게 나눠줬던 땅을 전부 협동하라는 내용의 개조였다. 모든 생산 수단과 권한, 토지를 다시 전부 빼앗아 국가 소유로 만드는 일을 벌인 것이다. 또한, 김일성은 이러한 사회관계의 개조를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이라는 경제건설 노선과 배합하였다.

 

  • 그런데 이 중공업 우선 발전 노선은 당 안에서 상당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당 내 다수의 당 고위층 간부들은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을 반대하였다. 반대파들은 전쟁 후유증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경공업 위주의 생필품 제공이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완강했다.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된다는 이 문제를 가지고 1956년 8월에 북한에서 당 전원회의가 열리게 된다.

1956년도 까지만 해도 당 전원회의를 하면 당 전원회의에 김일성이 옆에 앉아 있는데, 당 대표로 나와서 김일성을 비판할 수 있었다.

‘김일성동지 당신의 중공업 우선주의 노선은 잘못 됐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당시 당 회의에서 김일성을 전면 비판한 세력이 바로 중국 공산당 연안파. 말하자면 마오쩌둥과 모택동이 내보낸 중국 공산당 연안파와 이전 소련에서 있다가 나온 고려인들이었다.

김일성은 정치적으로 교활했고 대단한 수완가였다. 미리 정보기관을 통해서 이번 회의를 통해서 자기를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회의를 진행하고 바깥에다가 자기 측근 무력을 배치하였다. 당 회의 안에서 자기 모든 측근들에게 누가 나를 비판한다면, 비판할 때 즉석에서 일어나서 반박하고 그 때 회의에서 나를 비판한 자들은 그 자리에서 다 체포하라는 명령을 전했다. 현재의 쿠데타 계획과 같은 것을 지시한 셈이다. 이런 상황을 몰랐던 반대파들은 일반 공산당 회의라고 생각하여 비판하였다. 시간이 흘러 앉아 있던 김일성파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다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1956년 8월을 기점으로 해서 북한에서는 점차 정상적인 공산당의 집체 토의 시스템은 없어지고, 1인 독재 체계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1956년 8월 전원회의라고 불리는 북한에서의 8월 종파 사건이다. 북한의 독재 시스템이라는 것은 하루아침 사이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말, 북한은 경제적으로 이전 소련과 동유럽으로부터 큰 무상 경제지원을 받는다.

  • 김일성이 중공업 노선을 들고 천리마 운동을 준비하는 동안, 전 세계에 있는 사회주의 나라들이 북한을 도와주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북한을 도와주자는 생각으로 철, 화학공장, 입는 옷감 등 엄청난 양의 무상 경제 원조가 북한으로 들어왔다. 김일성은 무상 경제 원조를 이용하여 상상하기 힘든 상당히 빠른 속도의 공업화 과정을 시작했다.

한쪽으로는 정치적으로 모든 반대파를 제거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이전 소련과 동구권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무상 경제 원조를 통해 북한경제가 일어서면서 점차 김일성의 1인 독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제2절 6.25 전쟁 후 남한 현실

-한국도 50년대 말까지 미국으로부터 매해 3억 달러 어치 원조를 받았다.

  • 1950년대 말로 접어 들어가면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가 갑자기 삭감되었다.

미국이 원조를 줄인 것이다. 북한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원조가 늘어난 데 비하면 한국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원조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한국 경제 자체가 대단히 힘들어지게 되었다.

 

  •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정치는 대단히 부패하고 있었다.

당시 집권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는 국회를 둘러싸고 심각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라는 빨리 전쟁의 상처를 털고 근대화, 산업화로 나아가야 되겠는데 정치계에서는 이 산업화로 나가야하는 국민들의 희망을 읽지 못하고 국회를 중심으로 계속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정치는 부패하였고 경제는 털고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정치, 경제적 불안한 상태가 시작되었다.

결국 한국에서는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 4.19 혁명을 통해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서 이루지 못했던 남조선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오판을 하게 된다.

전쟁의 방법으로는 남한을 적화통일을 못 시켰는데, 가만히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안 돼서 한국 자체에서 정부와 체제에 대한 혁명이 일어났다고 봤기 때문이다.

1958년을 기점으로 해서 북한에서는 상당히 독재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반대로 1958년도에 상당한 민주화 과정이 추진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한국이 상당히 민주화로 가는 것으로 보였지만 4.19 혁명 이후, 예견치 않았던 군사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한 나라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 그러면 어떻게 박정희 대통령을 위수로 해서 그렇게 군대 내의 장교 집단이 뭉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혼란 상태의 남한에서 자신이 구조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군대 집단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당시 1950년대 후반기의 한국에서 국회, 정당, 행정 기관 등의 모든 집단들을 들여다보면 사회 내에서 가장 근대화가 된 집단이 군대였다. 일반적으로 보면 군대라는 집단은 사회에서 사회 발전 흐름에 제일 따라가지 못하는 집단, 상당히 수구적이고 기득권적인 부분에 집착하는 집단이다. 하지만 6.25 전쟁을 하면서, 한국에 군사 간부가 없었던 점을 파악했던 미국이 한국에서 똑똑한 젊은이들을 데려다 사관학교를 세우고, 사관학교 학생들을 미국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 미국의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일컫음)에 계속 비행기로 날라다가 공부시켰다. 전깃불도 없는 한국에서 밥도 변변치 않고 신발도 없이 살던 젊은이들이 미국 웨스트 포인트에 가서 하루아침 사이에 고기 햄을 잘라 먹고 미국 군복을 입었다. 강의가 없는 주말에는 버스 타고 미국을 다 돌아보았다.

그 때 한국 사회에서 군대처럼 일정하게 정규 교육과 해외 연수를 시키는 집단이 없었다. 지금처럼 회사가 돈을 지불해서 해외로 연수 보내는 그런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군 장교들은 미국으로 연수를 하고 오면서 선진국이라는 목표를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체험해왔다.

외부 세계를 돌아 온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있었다는 말이다. 근데 군대 청년 장교들이 한국에 와서 현실을 보니 암담했다. 나라를 현대화시켜야 하는데 국회 안에서는 계속 싸우고 있었고, 카리스마 있는 정치 지도자나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물론 정치적인 권력의 욕망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심리에는 이런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그 때 당시 군대 내에서 꽤나 청렴한 장군으로 알려졌던 박정희의 주위에 한 명, 두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5.16 쿠데타가 일어난다.

 

– 하지만 북한의 견해에서 보면 이런 이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과는 달리 북한은 한국 청년 장교들처럼 계몽되지 못했기 때문에 군인이라는 집단을 싸움밖에 모르고 머리가 둔하다고 생각하였다. 군인들이 정권과 국가를 잡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국가 재산이나 빼 먹고 술이나 먹고 계집들이나 끼고 놀고 그럴 것이라 과소평가하였다. 일반적으로 군사독재 정권이 올라가면 해당 나라의 모든 사회, 정치, 경제 발전이 더디게 되기 때문이다.

 

  • 하지만 한국에서 예상외의 일이 일어나게 된다. 60년대 초부터 군인들이 권력에 올라가면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산업화가 이뤄지게 된다.

물론 인권적인 측면, 민주화적 측면에서는 많이 퇴보했지만 산업화가 속도 있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남한은 경제적 성장을 크게 이뤄내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군대식 명령주의 체계가 산업화의 큰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6.25 전쟁 과정을 통해서 북한이든 한국이든 많은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고, 사람들이 죽어서 숱한 피해를 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를 하나로 조직화하는 힘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북한이나 한국이나, 이조 조선 때부터 일제 식민지에 있을 때까지 대다수의 남자들은 6.25 전쟁 전까지는 군대에 가보지 못했다. 이는 생활이 절도 있지 못했고, 다른 하나는 정확한 시간 개념을 갖지 못 해서 나라와 사회, 집단, 국민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수많은 남자들이 들어가서 집단생활을 하고 질서 있는 조직 생활을 하면서 한국이든 북한이든 전쟁 이후에 상당히 모든 집단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 한국 역시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군대식 명령주의 체계로써, 지금으로 말하면 독재라고 할 수 있는 체계로 강압적으로 내리먹이면서 엄청난 사회 분야에서 변화가 이뤄지게 되었다.

 

제 3절 50년대 60년대 남북한 현실에서 유사성

-1960년대 초부터 한국도 그렇고 북한도 그렇고 경제적으로 남과 북이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다.

  • 당시 남과 북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다 같이 군사 독재를 수립하고, 산업화에 달라붙었다. 특히, 둘 다 교육에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였다.

북한은 수많은 학생들을 동유럽으로 유학 보내게 된다.

한국에서도 역시 수많은 학생들이 일본, 미국과 같은 데로 유학을 가게 된다.

 

  • 남과 북은 6.25 전쟁 후 50년대 말부터 신원조회를 진행하였다.

한국이 조금 더 먼저 시작했지만 그 이후에 북한도 진행하게 된다. 신원조회는 모든 사람들의 일가친척들에 대한 신원카드와 도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한국이나 북한도 점점 연좌제가 도입되기 시작한다.

신원조회를 통해 북한에서는 모든 사람의 출처를 다 찾아냈다.

한국에서는 50년 말부터 연좌제를 도입하였다.

북한은 신원조회 후 온 나라의 군중의 등급을 매겼다. 핵심 군중, 동요 군중, 맨 마지막에 치안대에 가입했거나 지주나 친일 분자는 적대 군중으로 갈라서 온 나라를 성분화 하였다.

500년을 유지한 이조 조선에나 있던 봉건 시대의 시스템인 신분 제도를 1960년대에 다시 실시 한 것이다.

김일성은 왕이 바뀌어도 신분 제도가 유지되면 자신의 권력 구조가 후대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착안하였다. 그래서 공산국가 중 처음으로 신분 제도를 만들게 된 것이다.

 

  • 한국의 연좌제는 전두환 대통령 때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북한은 연좌제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내가 외교관으로써 외국에 나간다고 하면 나의 6촌. 내 어머니 쪽으로는 4촌까지 신원 조회를 한다. 감옥에 갔다거나, 한국으로 탈북 했다거나, 군대에서 탈영해서 잘못되는 등 어떠한 잘못으로 해서 제기되었던 대상이 있으면 외교관이 될 수 없다.

외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될 때 가족관계 쓰면 한 8장이 나올 정도이다. 사람 인원수를 세면 한 40명이 될 정도이고, 그 모든 사람이 어디서도 제기되는 부분이 없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성 중앙 기관에 못 들어가게 되고 핵심 계층이 아니면 절대 못 들어가는 국가 보위부, 보안성 등의 권력기관에 들어갈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6촌이 누군지 잘 알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아직도 북한은 연좌제가 존재하고, 당 역시 이런 비합리적인 사회를 유지하려면 성분제를 유지하는 게 대단히 중요한 점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 1960년대 말, 박 대통령은 전쟁의 방법이나 힘의 방법으로는 지금 당장은 북한과 싸울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 당시에는 한국이 경제력과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에 경제력을 추스를 때까지 멸공, 반공은 부르짖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북한처럼 국방력 건설에 열을 내지 않았다.

반면, 북한의 김일성은 조금만 더 힘내서 싸우면 한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북한은 이후 대남 적화통일 전략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범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큰 오판은 테러의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박정희 대통령만 제거하면 한국의 혁명이 승리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다양한 작전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김신조 사건이 터지게 된다. 북한 특수부대를 청와대로 파견해서 박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작전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다 실패하게 된다.

 

  • 게다가 한국을 치려면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순부터 이전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평화 공존 전략을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소련은 서방 세계와의 갈등 중단을 천명하고 평화 공존 전략을 채택하면서 모든 공산당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물론 북한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소련당과 북한 노동당 김일성은 갈라서기 시작하였다. 흐루쇼프를 반대하는 수정주의 노선을 취하게 된 것이다.

 

  • 김일성이 자극받았던 베트남 공산당의 게릴라전을 통해 김일성도 여러 가지 한국에서 유격대 활동을 벌이고, 청와대도 들이치고 하면 통일될 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나게 군사적 몸짓을 했는데, 흐루쇼프의 이전 소련이 도와주지 않았다.

 

– 196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대남 적화통일을 위한 야망에 사로잡혀 국가의 많은 재원을 국방력 강화에 돌리기 시작한다.

경제 건설과 국방 건설을 동시에 밀고 나가자는 주장을 한 것이다.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얻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평화적인 경제 건설에 돌렸던 많은 국가의 재원을 국방 건설에 돌린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점점 한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긴장해지기 시작한다.

 

  • 이러면서 점차 상당히 높은 속도로 발전을 하던 북한 경제는 1960년대 말부터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한국 경제는 가중한 국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북한과 반대로 고속 성장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