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동행 아카데미] 제 1장 다른 나라들의 통일 전례와 한국 분열 과정

1강 강의 내용 요약

  1. 머리말

최근 남북, 미북 정상회담으로 새롭게 정립되어가는 남북한의 관계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평화 체제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한편으로는 북한의 사기극이라고 주장한다. 통일한국에 대비를 하기 위해 북한은 남한을, 남한은 북한을 공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남북한 청년들의 통일 교육과 통일 인재 양성을 위한 제1기 남북동행 아카데미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아카데미 운영의 목적은 남북한 통일 정책 비교 과정을 통해 올바른 통일 방도와 통일 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의견 교환을 통해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을 넓혀 나갈 예정이다. 또한, 최근 여러 이슈들 속에서 남북, 미북 관계 문제에 대한 분석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현재의 국제 정세에 관한 강의도 진행할 예정이다.

제 1장 19세기 20세기 다른 나라들의 통일 전례

1강에서는 다른 나라들의 통일 전례와 한반도 분열 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주제로 강의하였다.

제1절 19세기 독일과 이탈리아 통일 사례

  •  19세기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의 무력 통일

인류 역사에서 통일에 대한 역사는 수차례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사례부터 알아보게 되면 19세기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사례를 먼저 알아볼 수 있다.

19세기의 독일은 신성 로마제국 이후 여러 군소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독일은 프로이센 왕국(북한에서는 프로시아로 교육)을 중심으로 민족 국가를 수립하자는 소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 제국까지 포함하여 통일하자는 대독일주의의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비엔나를 중심으로 한 합스부르크 왕조는 프로이센의 엘리트층의 지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소독일주의가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통일이 실현된다.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사용했지만 통일을 바라지 않았고 현재에도 독일과의 통일을 꿈꾸는 오스트리아인은 없다.

 

  •  19세기 이탈리아의 무력통합 통일

19세기 후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가리발디 장군을 내세워 무력으로 국내 분열주의 세력과 싸워 통일을 이룩했다. 언어와 문화가 같은 민족주의의 부활이었다. 하지만 무력을 이용한 통일이었다.

 

제 2절 20세기 독일, 예멘 베트남 통일
이제 현대 역사 속에서 세 국가의 통일을 살펴보자.

  • 독일 통일

독일의 통일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에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간략히 짚고 넘어가자면, 독일의 통일은 서독이 동독을 흡수한 흡수통일이다. 통일한국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남북한과는 달리 인적 교류도 있었고 동독 주민들은 서독 TV를 시청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전년도인 89년까지 민중 봉기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소련군의 무차별적인 진압과 정보기관의 통제가 가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외부정보의 유입만으로는 봉기가 일어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베트남의 통일

베트남의 경우 완전한 무력통일이다. 강력한 미군의 지원과 경제 원조로 세계 4위의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최신식 F-5 전투기가 100대 가량 있는 남베트남이 어떻게 소총만을 쥐고 있는 북베트남에게 무력으로 통일을 당했을까?

그 이유는 남베트남에게 있었다. 남베트남의 행정부는 부패하였고 대다수의 엘리트층은 해외로 자신들의 자산과 가족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또한 남베트남의 주요 요직에는 북베트남의 간첩이 포진되어 있었고, 실제 전쟁이 발발하자 남베트남의 전투기는 한 대도 뜨지 못하고 소총을 들고 달려오는 북베트남군에 패배하게 되었다.

  • 예멘의 통일

마지막으로 예멘의 통일을 살펴보면, 예멘은 합의에 의한 통일로 볼 수 있다. 최근 북한에서 주장하고 있는 연방제 통일의 모습이었지만 결국에는 남부예멘의 엘리트층이 북부예멘의 권력 장악에 봉기하였지만 패전하였다. 그 결과는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내전을 빚게 되었다.

이처럼 합의에 의한 평등 관계의 통일 전례는 찾아볼 수가 없다. 통일이라는 그 자체가 정복이나 흡수이다.

하나로 만든다는 뜻을 가진 통일의 상황에서 그 외의 대안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제2장 한반도의 분열

제 1절 분단의 원인

이제 한국 분단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북한에서는 한국 분단의 원인을 미국과 일본에 있다고 보고 교육하고 있다. 미국이 38선을 그어 놓았다는 주장은 옳다.

하지만 38선을 기준으로 만든 이유는 당시 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살펴봐야 알 수 있다. 일본은 소련과의 만주 전투와 미국과의 태평양 전투를 동시에 치르고 있었다. 따라서 군사력을 둘로 양분하여 전투 중이었는데, 그 때 당시 조선은 일제의 통치하에 있었다. 패전이 눈앞에 다가오고 8월 9일 소련군이 대일전쟁에 참가하자 일본 대본영은 38선을 기준으로 북조선 지역의 일본군은 중국 만주에 있는 관동군 사령부에 , 남조선 지역의 일본군은 일본 본토 방어 부대에 편입시켜 전쟁을 치뤘다. 일본군 작전 분할의 기준이 38선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 무장해제 선을 38선으로 기준을 세우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분단의 원인을 완전히 미국에게 전가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제 2절 6.25 전쟁 발발의 원인

  • 북한이 1950년 6월 25일을 전쟁 개시일로 정한 이유

그렇다면 분단을 유발하게 된 6.25 전쟁은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 발발했는가 알아보도록 하자. 6.25 전쟁은 다들 알다시피 북한의 남침에 의해 시작되었다. 김일성의 요구에도 스탈린과 모택동은 김일성의 공격을 승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핵 실험 성공으로 미국만 가지고 있던 핵무기를 소련도 갖게 되자 미국은 1950년 1월 20일 자유진영의 방어선, 애치슨 라인을 그었다. 여기서 한반도는 방어선 범위 내에서 제외되었고, 애치슨 라인을 만든 50년 1월로부터 5개월 만에 전쟁은 발발하게 되었다.

전쟁의 원칙으로 속전속결을 내세운 김일성은 춘천 6사단에서 고전을 맞이한 북한의 후속부대를 기다리자는 최용건과 대립하였다. 결국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음에도 서울에서 더 남하하지 않고 3~4일을 기다린 끝에 남한에게는 재정비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긴급히 소집한 전원회의에서 최용건은 전선사령관에서 내려오게 되고 김책을 중용하였지만, UN군과 미군의 참전으로 결국 김일성은 무력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하였다.

  • 6.25 전쟁이 북한에 가져다 준 역사적 교훈

북한은 이러한 역사의 교훈 속에서 주한미군이 있다면 통일과업을 완수하지 못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이유로 분단 이후 줄곧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위해 고안해 낸 방법 중 가장 실효적이라고 판단한 것은 바로 핵 개발이다. 과거 애치슨 라인이 그어졌던 상황을 돌이켜 보면, 소련의 핵 개발로 미국이 자신들의 방어 한계선을 한 발 물러선 경험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은 자신들이 핵무기를 갖게 되고 일본을 위협할 수 있는 미사일을 보유한다면 미국은 일본과 자국 중 선택을 해야할 상황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한 발 더 물러선 제2의 애치슨 라인을 긋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다 보면 인도, 파키스탄과 같이 암묵적인 핵보유 국가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어서 연계되는 방법으로 평화 체제 구축이다.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와서 주한미군의 주둔 비용이 과도하다는 여론이 형성될 정도로 관계가 재정립 된다면 남한의 시민들은 주한미군 철수를 자발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핵무기 개발로 인한 전례 없던 경제 봉쇄 정책으로 미국, 한국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해 국제사회로 나왔지만 핵무기 개발이 끝났다고 볼 수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비핵화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은 경제 봉쇄 해제와 정상 국가로의 인정을 위해 현재의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에서 다양하고 적극적인 몸짓을 보일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북한의 김정은이 선 신뢰구축 후 비핵화 도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어 북한의 비핵화 방식은 미국이나 국제사회의 비핵화 방식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조정이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시간이 흐르게 된다면 북한은 중국과 한국을 이용하여 CVID 포기를 유도할 것이다.

기본적인 북한의 통일 전략은 60년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