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지부지된 김일성의 로마 교황 북한초청 지시

내가 한국에 온 후 북한을 방문했던 종교계 인사들을 여러 명 만났다.

실지 북한에 여러 번 다녀온 분들이지만 나에게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이 북한에 진정으로 신앙의 자유가 있느냐, 봉수교회당, 장춘성당 등에 가 보았는데 거기에 나오는 교인들이 정말 신자들이냐, 북한 당국이 북한에 가정 예배소가 수백 개 있다고 하는데 사실이냐 등이다.

당연히 한국에서 교인들이 북에 가면 북의 종교계 인사들이 나와서 북한의 종교시설에 안내하면서 북에도 신앙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교회당에 가서 종교의식도 보면 북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지 않으냐 착각할 수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제 5장 68조에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법률적으로 보면 신앙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헌법이 모든 법의 기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말씀’, ‘당의 유일적 영도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조선 노동당 규약’과 같은 수령과 당의 정책이 모든 법의 기초로 된다.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고 되어있으나 당의 정책은 주체사상, 김일성-김정일주의만을 믿어야 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결국 당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으로 된다.

북한은 6.25전쟁 이후 주민들의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기독교 등에 대한 종교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리면서 종교를 철저히 탄압했다.

교인들은 성분 분류를 통해 북한에서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었고 철저한 감시통제를 했다.

북한은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한 일반적인 공산주의 종교관으로부터 더 나아가 종교를 ‘인민들을 억압, 착취하는 도구’, ‘제국주의의 사상 문화적 침투의 도구’, 앞잡이’라고 하였으며 교회를 ‘반동통치계급이 인민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사상을 선전하여 퍼뜨리는 거점’이라고 선전하였다.

1970년대 김일성은 북한 주민들은 노동당만 믿고 살고 있으므로 종교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선언한다.

북한은 1970년대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적화통일전략의 연장선에서 통일전선을 구축하려는 목적하에 북한 내에서 유명무실했던 종교단체들을 위장시켜 활동을 재개시켰으며 1980년대 남한에서 종교단체들이 민주화 투쟁에 나서면서 북한에도 기독교가 있음을 과시하는 대로 나갔다.

1988년을 고비로 평양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건설하고 한국의 종교단체들과 교류를 확대하는 대로 나갔다.

고 문익환, 문규현 신부 등이 반독재투쟁에 나서자 북한은 출판물들에서 ‘기독교를 제국주의 사상 문화 전파의 앞잡이’라고 부르던 것을 삭제하였으며 교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종교의식을 하는 장소’라고 점차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록 선전용이라고는 하지만 북한이 교회나 성당들을 평양에만 짓고 도들에는 짓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내가 북한에서 1990년대 초에 직접 겪은 일화를 한 가지 소개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

빨갱이가 종교 신자가 될 수 있을까?

북한이 남한의 민주화 과정에 힘 얻고 한국의 종교단체들과 적극적인 교류에 나서던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은 심각한 위기에 놓이게 된다.

1991년 세계공산권의 중심이던 소련이 붕괴하자 갑자기 커다란 외교적 고립에 직면한 김일성은 어떻게 하면 서방세계에 가 붙을 것인가 고민한다.

그러던 중 바티칸의 로마 교황이 다른 나라들을 방문할 때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뉴스를 보면서 로마 교황을 북한에 데려와 잘 환대해주면 북한이 서방 나라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일성은 즉시 당시 외교부장이었던 김영남에게 로마 교황을 북한에 데려오기 위한 작전을 벌여 볼 것을 지시한다.

외교부(당시는 외교부라고 불렀음)에 상무 조(TF)를 조직하였으며 외무성 일꾼들 외에 당 통일전선부 소속의 기독교연맹, 카톨릭 협회 등 종교 전문가들이 외교부 상무조에 들어왔다.

상무조에서는 외교부가 교황 방문과 관련한 외교 의례행사를, 당 통전부는 종교의식과 관련된 문제를 담당한다고 임무와 역할을 분담했다.

나는 우연히 그 상무 조에 포함되게 되었다.

외교부는 전 세계에 나가 있는 대사관들에 교황 환영행사 등과 관련한 자료들과 환영행사 VHS 테이프들을 들여보내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며칠 가만 일 하면서 보니 통전부 계통의 일꾼들이 아침에 출근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책이나 보거나 잡담만 하다가 시간이 되면 퇴근하는 것이었다.

외교부에서라면 큰일이 나는 일이다.

며칠 일하면서 서로 관계가 깊어지자 하루는 슬며시 통전부 일꾼들에게 왜 교황 방문준비와 관련한 실무준비를 하지 않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그들이 하는 말이 ‘교황의 북한방문 문제는 이미 김정일 장군님께서 안된다고 결론하신 문제여서 더 진척시킬 수 없는 문제인데 수령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외교부에서 한번 해 보라’는 식이었다.

그때는 북한의 모든 정책 결정, 채택 권한이 김정일에게 넘어간 때였으므로 김일성이 아무리 하라고 해도 김정일이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 생각에도 로마 교황이 평양에 오면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해소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은 명백하였다.

그런데 통전부 일꾼들이 하는 말이 로마 교황이 북한에 오면 그 이후의 뒷감당은 통전부와 보위부가 해야 하는데 뒷감당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슨 소리인가 하고 다그쳐 물어보니 그들이 나에게 하는 말이 북한에 교인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종교는 나쁘다는 교육만 받았고 북한 영화 ‘최학신의 일가’, ‘성황당’ 등을 통해 반종교 교육만 받았으므로 북한에 교인이 있겠는가 하는 그들의 질문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나에게 하는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북한 노동당에서 당의 종교정책을 담당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이어서 북한의 종교실태와 종교가 북한체제에 주는 위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북한 노동당이 1980년대 봉수교회와 장충성당 등을 지은 목적은 1980년대 한국 민주화 투쟁에서 종교단체들이 반정부 쪽으로 나가자 이들을 포섭대상으로 삼고 보여주려는데 있었다.

그런데 교회를 운영하자면 가짜 교인들이 있어야 했다.

목사들은 당에서 내려보내 줄 수 있지만, 교인들은 아무래도 교회 주변의 핵심군중 속에서 뽑아야 했다.

처음 교회가 건설되던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일요일에 휘발유나 경유를 쓰는 버스가 운영되지 않았다.

봉수교회나 장춘성당을 일요일마다 정상운영하자면 당연히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핵심계층 속에서 교인으로 활동할 ‘빨갱이 여성’들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성들을 모아 놓았으나 매주 일요 날 그들을 교회에 불러내어 종교의식에 참여시킨다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출석부를 만들어 놓고 나오지 않는 여성들은 생활총화(자아 비판과 호상 비판)에서 비판하고 또 특별강습도 주었다.

특별강습에서는 여성들에게 교회에 나와 찬송가 합창 등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미제와의 반미 성전에 떨쳐 나선 남조선 종교계 인사들을 쟁취하기 위한 숭고한 조국 통일을 위한 투쟁이다는 식으로 가르쳤다.

그래도 처음에는 일요일 오전 집에서 쉬지 않고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이 힘들었다.

많은 여성이 아프다,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빠지기가 일수였다.

그런데 점차 교회를 운영하면서 여성들의 동향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점차 통제는 늦추어졌는데 오히려 빠지는 여성 수가 줄어들고 어느 날 출석을 긋지 않아도 여성들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여성들이 일요일 교회에 나와 보니 노래도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도 듣고 하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사교도 되고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매주 예배드리는 시늉을 하고 찬양을 배우던 이들이 믿음이 생기자 예배시간 되기 전부터 교회에 와 있고, 조금만 아파도 안 나오던 이들이 고열 속에서도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전도하면 총살이나 처벌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쉽게 믿음을 가졌는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들의 자발적인 모습에서 진짜 신앙이 생겼음을 당은 간파했다.

이후 당에서는 봉수교회 주변 아파트에 망원경을 설치해놓고 교회당 주변을 감시했다.

교회당 주변이 사람들이 몰래 모이는가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숨어 있는 신도들을 잡아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을 발견한다.

교회당에서 찬송가가 울려 나오면 일부 청년들이 교회당 담장에 기대 무엇인가 열심히 적어가지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보위부에서는 그들을 체포했다.

잡아놓고 보니 음악대학 작곡반 학생들이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한음악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세계 명곡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당 창문으로 나오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은 한 음악대학 학생이 그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렸고 동료들은 교회당에는 들어가지 못하니 몰래 담장 밖에서 채보(선율을 책에 메모하는 것)하였던 것이다.

보위부에서는 학생들을 경고하고 놓아주었다.

다음 발견된 것은 일부 사람들이 일요일마다 교회당에서 종교의식을 하는 시간이면 그 옆길을 어김없이 거닐고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간대에 계속 나타나는 사람을 체포하여 조사해보니 이전 신자였다.

결국 1970년대 김일성이 북한에는 더는 신자가 없고 종교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선포했으나 결국 신자들의 신앙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자들이 북한당국의 반종교정책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다고 했을 뿐이었다.

결국 당에서는 더는 교회나 성당을 지으면 안 되겠다고 결정했다.

통전부 종교관계자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수령님께서 로마교황을 데려오라고 교시하시었으나 사실 통전부에서 이미 1980년대 말에 로마 교황청과 사업해 보았으며 사업 결과를 보고 받은 김정일 장군님께서 로마 교황청과의 사업을 잘못하다가는 사회주의 제도가 위태롭게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주시었다는것이였다.

결국 김일성이 외교부에 로마교황을 데려오라는 지시를 주었으나 김정일이 담당하고 있던 당 통전부에서는 데려오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통전부 일꾼들이 로마 교황을 북한에 데려오면 안 된다는 이유는 대략 이러하였다.

로마 교황청과 사업하면서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선전하니 교황청에서 그러면 살아 있는 신자를 데려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노동당의 가톨릭교회연맹 관계자들이 조용히 사회안전부(지금의 보안성) 주민등록부를 뒤져 6.25 전까지 독실한 신자로 살아온 한 노파를 찾아냈다.

그에게 아직도 하느님을 믿는가하고 물어보니 그는 처음에는 큰일 났다, 수령님과 노동당이 있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고 하는 것이었다.

관계자들이 솔직히 말해도 큰 문제 없을 것이고 실지 아직도 하느님을 믿는 독실한 신도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돼서 그런다고 이야기하니 그가 마음을 열면서 하는 말이 하느님은 마음속에 한 번 들어왔다가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면 하느님을 어떻게 만났느냐고 물어보니 자기 집 뒤울 안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막상 뒤울 안에 가보니 관계자들의 몸이 찌릿해지는 것을 느끼었으며 자기도 모르게 여기가 진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혁명의 이익을 위해 대표단 성원으로 바티칸에 한 번 가야 하겠다고 이야기해주니 그가 하늘을 보면서 하느님이시여, 일생 열심히 기도를 드렸더니 어린 양을 불러주시네요 하고 말했다고 한다.

일꾼들이 하느님이 불러 주신 것은 아니고 혁명의 이익을 위해 한 번 바티칸에 가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느님이 불러주신다고 믿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자기 아들도 자기가 밤마다 뒤울 안에 가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모르니 제발 아들에게 자기가 신도라는 사실을 숨겨달라고 부탁했다.

북한에서 신도들을 탄압하니 아마 아들이 자기 어머니가 신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불안해 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 바티칸에 가니 그 여성이 교황 앞에서 카톨릭의 예법대로 경의를 표시하였으며 교황청 사람들이 그의 눈빛을 보더니 진짜 신도가 맞다고 인정했다.

이를 보고 북한 노동당은 종교는 정말 대단해서 위협과 공포와 죽음으로 믿음을 뺏는 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결국 원산, 강계 등 지방에 하나씩 종교시설을 건설하려던 계획은 취소되었다.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지방에 교회나 성당을 지었다가 당의 오랜 탄압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신자들이 ‘당에서 없앴던 교회를 짓는다니, 하나님의 뜻이 내려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더 굳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전부 관계자들은 만일 교황을 북한에 데려다 잘 환대해주면 북한이 어느 정도 대외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대내적으로는 지하 종교활동이 늘어나고 신도들의 신앙심이 더 두터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로마 교황청 상무 조에 망라된 통전부 관계자들이 교황초청사업에 열성을 내지 않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상무 조의 활동은 활기를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2달 만에 슬며시 해산되었다.

이렇게 김일성의 로마 교황 초청 교시 집행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